율곡공

율곡공 사진11536-1584( 중종 31- 선조 17 년 ) 자는 숙헌 ( 淑獻 ) 호는 율곡 ( 栗谷 ) , 석담 ( 石潭 ), 우재 ( 禹齎 ) 29 세에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되고 예조좌랑 · 이조좌랑 등을 역임 , 33 세 (1568) 에 천추사 ( 千秋使 ) 의 서장관 ( 書狀官 ) 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 명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였다 . 이해에 성혼과 ‘ 지선여중 ( 至善與中 ) ' 및 ‘ 안자격치성정지설 ( 顔子格致誠正之說 ) ' 을 논하였다 .

34 세에 동호문답 ( 東湖問答 ) 을 지어올렸다 .

37 세에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 ( 理氣 ) · 사단칠정 ( 四端七情 ) · 인심도심 ( 人心道心 ) 등을 논하였고 , 39 세 (1574) 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하여 〈 만언봉사 萬言封事 〉 를 올렸으며 , 40 세 때 성학집요 ( 聖學輯要 ) 를 제진하였다 .

42 세에 격몽요결 ( 擊蒙要訣 ) 을 지었고 , 45 세에 기자실기 ( 箕子實記 ) 를 편찬하였다 .

47 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 어명으로 〈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 〉 을 지었다 . 이해에 김시습전 ( 金時習傳 ) 과 학교모범 ( 學校模範 ) 을 지었으며 ,

48 세에 시무육조 ( 時務六條 ) 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

49 세에 서울 대사동 ( 大寺洞 ) 에서 죽었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 파주의 자운서원 ( 紫雲書院 ), 강릉의 송담서원 ( 松潭書院 ), 풍덕의 구암서원 ( 龜巖書院 ), 황주의 백록동서원 ( 白鹿洞書院 ) 등 20 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