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澤當) 지음

덕수현(德水縣)은 본디 고구려의 덕물현(德勿縣:또는 仁勿)이었는데 신라 때에 덕수(德水)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경기 도에 속하여 해풍현(海豊縣)과 합쳐서 풍덕군(豊德郡)이 되었다 [개성부(開城府)와 접경하고 서울과의 거리는 179 리이다]. 덕수현에 이씨가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때부터였으나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보첩(譜牒)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나의 고조(高祖) 이신 용재(容齋:荇)선생이 손수 초하신 세계와 연보(年譜)에는 추밀공(樞密公) 양준(陽俊)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출처가 뚜렷치 않으며, 율곡(栗谷:珥) 선생댁에 전해오는 세계에는 중랑장(中郞將) 돈수(敦守)를 시조로 하고 추밀공은 그의 아들이 라 하였다[양천 허씨(陽川許氏)와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족보에도 그러하다]. 이제 율곡 선생댁에 전하는 세계에 근거하여 중랑장을 시조로 삼아서 계도(系圖)를 작성하되 용재 할아버지께서 손수 초하신 연보에 의거하여 추밀공으로부터 열전을 만든다[벼슬 이름을 첫머리에 써 넣을 때 혹은 증직(贈職)을 쓰거나 그대로 원직(元職)만을 쓴 적도 있으나 모두 선대로부터 호칭한 것이고 지금 고친 것은 아니다].

[<고려사>의 조충전(趙沖傳)을 살펴보면, 고종 4년(1217년) 거란(契丹)이 침공해 왔을 때 조충이 서북면 원수(元帥)가 되어 성천(成川)에 이르러 각도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경상도 안찰사 이적(李勣)이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적을 만나서 전진하지 못하자 장군 이돈수(李敦守)와 김계봉(金季鳳)을 파견하여 이들 적군을 치고 이적을 맞이하려 했으나 적군은 이미 두 길로 나뉘어서 곧바로 우리 중군(中軍)을 공격해 왔다.

이에 아군이 좌우익진(左右翼陳)을 펴서 북을 울리며 전진하니 적군은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져 도망했으므로 돈수 등은 이적과 만났다고 한다.

중랑장의 생몰년(生沒年)이나 관직을 지낸 경력 등은 모두 고증할 만한 자료가 없으나, 추밀공이 중랑장의 아들로서 고종 4년 에 나이 16세가 되었으니 중랑장의 나이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유명한 인물로서 같은 성명을 가진 이가 없을뿐더러 조충을 따라서 거란군을 토벌하고 중랑장이 된 사실의 의심할 바 없기에 이에덧 붙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