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證) 숙인(淑人) 진주하씨(晉州河氏)

숙인(淑人)은 경산현령(慶山縣令) 증(贈)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덕수이씨(德水李氏) 원근(元謹)의 배(配)이다.

일찍 돌아가시고 연대가 오래되어 숙인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어 집안에 전하여지는 옛 이야기를 기록한다.

숙인(淑人)의 성(姓)은 하씨(河氏)이고 본관(本貫)은 진주(晉州)이다.

진주(晉州) 송곡( 松谷. 현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마을)에서 봉사(奉事) 하취홍(河就洪)의 이녀 중 맏딸로 출생하였다. 고조(高祖)는 산음현감(山陰縣監) 하순(河淳)이고, 증조(曾祖)는 거제현령(巨濟縣令) 하계지(河繼支)이며, 조(祖)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하윤(河潤)으로 진주9현(晉州九賢)으로 정강서원(鼎岡書院)에 배향되었다.

또한 후손들은 근세에 이르기 까지 만석군의 살림을 일구는 등 대대로 그 지역의 명문으로 이름 높았다.

숙인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고 엄정하여 기품과 도량이 있었고, 지금까지의 주의나 태도를 바꾸고 자기를 돌보지 않으며 성품이 곧고 아름다워 여사(女士)의 품행이 있었다.

숙인의 이와 같은 행실을 숙인의 *작은어머니(참봉(參奉) 하취연(河就演)의 부인 덕수이씨)가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당시 큰아들의 마땅한 배필을 찾고 있던 친정집 셋째 작은아버지 이울(李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게 알려 사촌동생 원근(元謹)의 배필로 맞이하게 하였다.

시집와서는 시부모를 효성과 공경으로 섬겼으며 예(禮)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니 집안 식구들 모두가 아끼고 칭송해마지 않았다.

부군(夫君)이 늦은 나이에(37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내 외직을 역임할 때 마다 늘 옆에서 보필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그러나 시집 온지 30여년이 지나도록 슬하에 자식을 얻지 못하자 밤낮으로 근심이 깊어갔다. 그러자 부군의 동갑나기 사촌형제 인 감찰공(監察公) 이원수(李元秀. 율곡 이이의 父)는 계자(系子)를 들일 것을 조언하기도 하였지만 부군께서도 아버지가 자식을 늦게 얻었던 이유를 들어 더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인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이상 이씨(李氏) 가문에 대(代)를 이을 후손을 낳을 수 없음을 절감하고 조상에 득 됨이 없음을 더 강하게 심리적 압박감으로 엄습하여 스스로 의절 (義絶)하시었다.

전통적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숙인이 받았던 중압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고통이었고, 아마도 자신으로 인하여 자손 을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자식이 없다고 모두가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고 양자를 들일 수도 있었을 상황에서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숙인의 이와 같은 절의(節義)에 모두 놀라고 애통해 마지않았다.

숙인은 친정 형제간에도 우애도 깊었다.

숙인에게는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 조정견(趙庭堅)에게 출가한 동생이 있었는데, 숙인이 돌아가시자 오래 함께 살았던 전민(田民.農民)이 나가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생 하씨(河氏)는 자기 재산의 태반(太半)을 그 농민에게 밀어주었고, 그 아들 인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조감(趙堪)은 또 노비 27인과 밭 9석지기도 모두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였으니, 그것은 보통사람 한 집의 살림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찰공 이원수(李元秀)가 매양 마음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부군의 벼슬에 부(附)하여 영인(令人)의 직함을 받고 모년(某年)에 선영인 파주 문산읍 선유5리 산13-1(현. 문산 선유리 산업 단지내 공원) 시아버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울 묘소 우록(右麓)에 장사지냈고, 후에 경산공 이원근이 사망하자 숙인 과 합폄하여 쌍분으로 장사지냈다.

이는 나중에 경산공 계배(繼配) 진주정씨(晉州鄭氏) 기장군수(機張郡守) 희경(熙慶)의 딸)가 자식 없이 의(義)를 위하여 죽은 숙인의 원혼(冤魂)을 달래기 위해 부군인 경산공과 숙인을 합폄하게 하고, 정씨(鄭氏)는 경기 광주 고등동 고산곡에 따로 장사 지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후에 부군의 아들 덕풍군(德豊君) 이통(李通)의 벼슬이 거듭하니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의 증직을 받았고 부군의 직에 부 (附)하여 숙인(淑人)에 봉하여졌다.

숙인의 이와 같은 결의는 현대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숙인의 절의와 희생이 바탕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덕수 이씨 해풍군파(海豊君派), 의정공파(議政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효정공파(孝貞公派), 북계공파 (北溪公派)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으며, 덕수이씨가 명문으로 성남지역에 공헌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존재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숙인의 의로운 기록을 남기고 숙인을 추모하며 숙인을 기억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