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인 정씨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버지는 군수 희경(熙慶)이고 할아버지는 현감 주(宙)이며, 외할아버지는 진양하씨 (晉陽河氏) 영(瑩)이다.

문명높은 집안에서 4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품성이 인자하고 성격이 무던하여 부모에게 효도가 지극하였다. 정씨(鄭氏)가 경산(慶山)현령 이원근(李元謹)에게 출가하여 경산, 서울 등 부군의 임소에서 생활 하던 중 둘째 아들 通이 再從淑 麟祥(인상)에게 양자로 출계하자 함께 廣州 (현 성남시 고등동 4통 등자리)로 옮겨 오게 되었다. 1564년(명종19)부군 경산공이 어린자제들(장남 11세, 차남 9세, 장녀 1세)을 남겨두고 세상을 뜨자 젊은 나이에 어려운 처지가 되었지만, 부군의 유언을 받들어 자제를 再從兄 율곡(栗谷)에게 보내 수학하도록 하고 덕의와 겸손의 가정교육에 전념하였다.

경산공과의 사이에 이남 일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충무위 부사용 적(適, 증 좌승지)이고, 차남은 順川군수 (증 영의정) 通이다. 딸은 찰방 최준(崔濬)과 혼인하여 승지 유연(有淵)과 삼녀를 두었다.

숙인의 생몰년도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중종 조(中宗朝) 1532년 전 후로만 짐작할 뿐이다. 다만 숙인의 면모를 짐작하게 할 기록이 7대손 이석의 문집 동강유고(桐杠遺稿)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산공의 첫 부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인데 일찍 돌아가시어 坡州에 장례 지냈다. 자식이 없었고 오직 숙인께서 두 아들이 있었다. 공(公)이 비로서 가세를 이루고 일찍이 광주 고산동(高山洞)을 복지(卜地)로 선산을 정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두 아들이 어리어 숙인이 상사(喪事)를 주관하며 파주에 장례하고자 하니 시댁어른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면서 광주는 망인 (亡人)께서 일찍이 본인의 돌아갈 곳으로 생각했으니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숙인이 말하길 원배(元配)하고 합장 하는 것은 예(禮)입니다. 내가 자식이 있고 初配는 자식이 없이 장례를 치루었는데 합사하지 않는다면 그 혼백이 의지할 곳이 없을 것이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가문의 말씀대로 광주에 장사지내려면 내가 죽은 다음에 장례 하십시오. 나는 차라리 정에 흠이 있더라도 의로움에 합당하면 이에 따르겠습니다. 하니 시댁 어른들이 모두 기뻐 복종하고는 경산공을 파주에 합장 하게 하였다. 후에 숙인이 돌아가시자 광주에 장사 지냈다.

후에 통의 다섯 아들 중 넷이 문과급제하고 한아들이 사마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백천군수, 전라도 관찰사, 병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며 그 손자들도 연이어 과거급제하고 자손이 번창 하여 온 세상에 떨치니 사람들은 혹 묘소의 음덕으로 자손들이 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은 숙인의 덕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여기면서 기록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숙인 정씨가 원배(元配) 진주하씨(晉州河氏)와 부군의 합장에 집착하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원배가 자식이 없이 죽은 것도 한 이유가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원배가 나이 오십이 넘도록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자, 스스로 의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였기 때문이었다.(경산공 비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실로 2006년 5월 29일 정씨 묘소를 사초하면서 혼유석 밑에서 청회 백자 지석이 나왔는데 그 지석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숙인이 젊은 나이에 홀로되어, 부군의 초상을 치르며 보여준 의연함과 어린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내 덕수이씨가 성남지역에 명문으로 우뚝 설수 있게 된 배경에는 숙인 정씨 같은 어머니의 희생과 의지가 밑바탕 되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기에 사백 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묘소는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산37-4번지 덕수이씨 선영 辛坐(신좌)에 아들 通(통)의 묘소 아래이다.

이는 율곡의 묘소가 사임당 신씨의 묘소 아래에 쓰였던 것과 같이 당시 묘제를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