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위(五衛) 부장(部將)이원순(1505~)의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다. 증조(曾祖)는 온양군사(溫陽郡事) 증(贈) 좌찬성 (左贊成) 추(抽)이고, 조(祖)는 홍산현감(鴻山縣監) 증(贈) 대사헌(大司憲) 의석(宜碩)이며, 1505년(연산11)아버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울(菀)과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신천강씨(信川康氏. 현감(縣監) 윤보(允寶)의 딸)와의 삼남 일녀 중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경산현령(慶山縣令. 贈 司憲府 執義) 이원근(李元謹)과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 이원겸(李元謙)이 그 형이다.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내직을 거치고 오위(五衛)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5위는 의흥 · 용양 · 호분 · 충좌 · 충무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중 · 좌 · 우 · 전 · 후부 등 5부씩 두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에 따라 각 위를 맡은 위장 (衛將) 밑에 각 부를 맡은 부장이 5명씩 배치되어 있어 총 25부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각기 자기 소속부의 병종(兵種) 이 수행하는 입직(入直) · 행순(行巡) · 시위 등의 책임을 졌으며, 전투·훈련 등에도 각 부의 병종을 지휘, 감독하였다. 부장은 선전관(宣傳官) · 진무(鎭撫)와 함께 서반청(西班廳)요직으로 꼽혀, 이들에게는 그 아들에게 음서(蔭舒)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시취(試取)로 임명하였으며《경국대전》의 부장 시취규정은 다른 군직과 비교해볼 때 꽤 까다로운 규정이었다. 그러나 세조 당시에는 시취에 합격하지 못했을지라도 군율(軍律)에 정통하고 부하를 통솔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부장으로 임명 하기도 하였다.

근무 일수[仕滿] 900일이 되면 천전(遷轉) 가계(加階)하였고, 그 근무평가는 5위장들이 상 · 중 · 하로 매겨 도총부에 보고 하였다. 한편 근무 일수를 마친 부장들은 시가(試可)를 거쳐 수령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부장은 재상 자제 등 문음(門蔭) 출신자들이 대거 진출하는 음직(蔭職)으로 변하였다 종 6품) 아버지 수사공(水使公)이 돌아가신 후 서울 두모포(豆毛浦. 현 옥수동 한강변 동호대교 북단 포구)에 살았는데, 부장(部將)을 하던 시절에 1538년(중종33) 어려운 살림에 위졸(衛卒)을 시켜 쌀과 베를 거두어들인 것이 문제가 되어 추고되기도 하였고, 이억만 (李億萬) 이억년(李億年)등 과 동철(銅鐵)을 다투다가 김장근(金長根)이 죽게 되는 일을 겪기하였다.

의인(宜人) 한산이씨(韓山李氏. 僉使 宗光의 딸)와 이남 일녀를 두었으니 수(遂) 봉(逢)이 아들이고 딸은 나주인(羅州人) 무과(武科) 판관(判官) 김응문(金應文)에게 출가하였다.

돌아가신 해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묘소 또한 실전(失傳)하여 후손들이 뜻을 모아 수사공(水使公)묘하에 제단(祭壇)을 마련 하고 매년 시월에 시향(時享)을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