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이조참판 이주(1599~1664)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백겸(伯兼)으로 인조, 효종 때의 문신이다.

1599년(선조32) 증 좌의정 백천군수 이경민(李景閔)과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永誠君 祝의 딸)와의 사이에 삼남 중 맏이로 출생하니, 靑山현감 이엄(李)과 승정원 좌승지 이래(李)가 동생이다.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가 여러 내직을 거치고 외직으로 나가 1632년(인조10) 경상도 개령현감(開寧縣監)을 보임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평산현감(平山縣監)에 옮겨 부임하였고, 이어 1637년(인조15) 내직으로 들어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 1638년(인조16) 양재찰방(良才察訪) 에 임명되었다가 10월에 외직으로 나가 금성현령(金城縣令)에 보임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1644년(인조22)내직인 전생서 주부 (典牲暑主簿)에 제수되었다가 횡성현감(橫城縣監)에 보임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전생서 주부로 있었는데(1648년) 이때 역옥과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다가 풀려났다.(1651년 효종2) 1654년(효종5) 10월 전라남도 여산부사(礪山府使)에 부임 하였다. 부임하여서는 백성들을 잘 다스려 근무평가 등을 잘 받았고 칭찬을 들었으나, 인조반정공신 원두표(元斗杓)가 방백(方伯)으로서 사사로운 일로 하급관리를 벌주려 하자, 그 부당한 이유를 들어 거부하자 크게 화를 내며 장리를 죽이고 그를 삭탈관직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직첩을 돌려받고 서용하라는 명을 받았다.

1658년(효종9) 3월 신천군수(信川郡守)에 제수되어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들어와 1661년(현종2)11월 사직령(社稷令)에 제수 되었는데 이때 그를 정조당상(政曹堂上)에서 두 자리에 겹쳐서 추천하였다는 사헌부 대사헌 김좌명(金左明)의 탄핵으로 체차되었다.

1664년(현종5) 4월 23일 졸하니 향년 66세이다.

부인은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인품이 충후(忠厚)하고 예의범절에도 법도(法度)가 있었다. 주부(主簿) 유충건(柳忠健)의 딸인데 그 아들 사어(司禦) 유시량(柳時亮), 손자인 府使 유송재(柳松齋)과 함께 삼대에 걸쳐 효행으로서, 충주에서 유명한 집안이었다.

둘 사이에 육남 일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희준(喜俊)이고 차남은 희석(喜錫)이며, 삼남은 홍산현감(鴻山縣監) 희상(喜相)이고, 사남은 형조좌랑 희하(喜夏), 오남은 진사 희만(喜萬), 육남은 증 이조판서 희장(喜章)이다. 딸은 육오당(六俉堂) 정경흠(鄭慶欽)에게 출가하였는데, 그는 그의 후손들과 함께 문인 화가로 유명하였지만 지조와 덕행으로 더 유명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문산읍 선유리 산업단지내 공원(구 파주 문산읍 선유리 산14번지 덕수이씨 선영)에 조부(祖父) 증 승정원 좌승지 이적(李適)묘하에 부인과 합장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