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엄(1602~1669)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정춘(正春)이며 인조, 현종 때의 문신이다.

1602년 (선조35년) 백천군수(白川郡守) 이경민(李景閔:증 좌의정)과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영성군 (永城君) 축(祝)의 딸)사이에 三男중 둘째로 출생하였으니, 신천군수(信川郡守) 이주(李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이래(李)가 그 형제이다.

11살 되던 해 어머니를 병으로 여의고 14살 되던 해 숙부(叔父)인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경용(李景容)에게 양자 (養子)로 출계(出系)하였다. 이후 함북종성(鐘城), 경기광주(廣州), 강원양양(襄陽)등 양부(養父)의 임지(任地)를 따라 다니며 아버지 일을 도우며 실무를 두루 익혔다.

1635년(인조13)양부(養父)와 그 이듬해 양모(養母) 상(喪)을 연이어 당하여 삼년시묘를 마쳤다. 1646년(인조24)3월 27일 음직 (蔭職)으로 벼슬길에 나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고, 그해 11월 12일 외직으로 나가 제천현감(堤川縣監)에 부임하였는데 보임 시 정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652년(효종3)7월 친부(親父) 이경민(李景閔) 상(喪)을 당하였고, 상을 마치고 서용(敍用)하라는 명에 의해 1660(현종원년)년 7월 7일 상운찰방(祥雲察訪:경북 봉화군)에 임명되었고, 이후 1666년 2월 12일 (현종7년)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로 옮겨 보임 중, 다시 외직으로 나가 10월 26일 청산현감(靑山縣監)에 제수되었고, 양현고 직장(養賢庫直長)과 청주진관 동첨병마절도 위(淸州鎭管 同僉兵馬節都尉)를 겸직하였다.

1669년 8월 13일 68세를 일기로 졸하니 용인군 기흥면 영덕리 덕암산(德岩山) 해좌(亥坐)에 장사지냈고, 그 이후 후손들이 묘하(墓下)에서 번창하여 덕수이씨 감사공파(監司公派: 諱 李景容)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2004년 용인, 흥덕 택지지구로 편입되어 수용됨으로 인하여 마을이 없어지며 다시 고향인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등자리)산6번지 덕수이씨 선영으로 이장(移葬)하기에 이르 렀다.

부인 평강채씨(平康蔡氏)와의 사이에 사남 이녀가 있고 계배(繼配) 청주한씨(淸州韓氏)와의 사이에 일녀가 있다. 측실에서는 이남 이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