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은 덕수인(德水人)이고 이름은 래(䅘)이며 자(字)는 추빈(秋賓), 호(號)는 릉호(菱湖)이시다.

1603년(선조36) 9월 18일 증 좌의정 이경민(李景閔)과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永城君 諱 祝의 女)의 삼남으로 생 (生)하시다.

1624년(인조2) 진사(進士) 3등에 입격하시고 1637년 종묘부봉사(宗廟副奉事)로 관직에 나가 이듬해 庭試 乙科2등에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관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이듬해 사헌부감찰, 지평으로 승서(陞敍)하시다.

1640년 예조정랑으로 소현세자 귀근(歸覲)에 대한 사례사로 중국 심양(瀋陽)에 다녀오고 다시 지평(持平)으로 홍문관저작 (弘文館著作)을 겸하고 이듬해 병조정랑, 사간원정언을 거쳐 춘추(春秋)를 겸대하시다. 홍문관(弘文錄)에 권점(圈點)되고 칠월(七月)에 양서순찰사종사관(兩西巡察使從事官)이 되어 심양으로 가는 군병을 위문하고 돌아오시다.

이듬해 다시 지평이 되어 감시관(監試官)으로 과거(科擧)를 주관하고 홍문관부교리, 수찬이 되고 사간원헌납으로 홍문관 지제교를 겸하시다.

1643년 홍문관교리로 백천군수(白川郡守)에 보임중인 아버지를 근친(覲親)후 돌아와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고 부 수찬으로 옮기시다.

이듬해 이월(二月) 심양에 인질로 계시던 소현세자께서 잠시 귀국하였다 돌아갈 때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으로 배종하시다. 이때 청나라 구왕(九王) 다미곤(多爾袞)이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며 세자를 전장(戰場)에 동행시킴에 공(公)은 세자를 보필하며 전쟁의 상황을 본국으로 치계하시다.

팔월(八月)에 잠시 귀국하여 명(明)의 패망원인과 구왕(九王)의 인품, 민심의 수습방안, 전쟁의 과정등을 세밀히 진계(陳啓) 하시다. 또한 역관 정명수(鄭命壽)의 과도한 쌀 요구에 대하여 당시 평안도 농작상황을 아뢰고 백성들이 흩어질 것을 걱정하여 별도의 조치를 요청하시다.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이듬해 이월(二月) 인질에서 풀려나는 세자를 모시고 귀환하시니 배종관의 공으로 자급(資級)이 오르 시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환국 후 두 달 만에 돌아가시자 봉림대군을 새 왕세자로 책봉하는 전책관(傳冊官)이 되어 책문(冊文)을 선포하시다.

이듬해 삼월(三月)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났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시었고, 이후 이듬해 시월(十月) 까지 승정원 좌, 우승지로 청(淸)과의 외교문제, 자연재해로 인한 구휼대책, 소현세자와 관련된 국내정치 갈등 속에 왕명출 납을 관장하고 국가 중요회의에 참여하시다.

1647년(인조25) 시월(十月) 외직으로 광주부윤(廣州府尹)에 보임하였으나 이듬해 십일월(十一月) 부친의 병세가 위중하여 사 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시다. 이때 마침 남한(南漢)의 포흠된 군향(軍餉)을 독징(督徵)하라는 수어사의 명(命)이 있었고, 이를 어기었다는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되시다.

효종이 즉위하고 숭정원 우승지(承政院 右承旨)로 복귀하여 군기사(軍器寺)의 규율을 정비하고, 활인서 환자의 실태를 조사 하여 보고하는 등 빈민구휼과 치료에 힘을 기울이시다.

이듬해 1650년(효종원년)형조에서 감사(監司)로 추천 받았으나 이상진(李象震)등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 (文簡公) 성혼(成渾)의 문묘봉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며 공(公)이 윗사람의 총명을 막아 가린다는 배척을 받으시다.

유월(六月)에 공(公)의 지병이 악화되어 체직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약방부제조(藥房副提調)를 겸하게 되고, 몇 번의 사직 상소도 반려되시다. 공(公)께서는 투병의 고통 속에도 출근시간을 어기는 법이 결코 없었으며, 돌아가시기 전 까지도 소대 (召對) 십일월 이십일(十一月 二十日)에 입시하여 죄수를 적간(摘奸)한 결과를 보고하고, 병든 죄인을 간병하지 않은 월령의원 (月令醫員)의 추치(推治)를 청하였으며 인재등용에서 세자빈 간택에 이르기 까지 승지로서 소임을 다하시다.

공(公)의 성품은 온화하고 양순한데다 지론이 까다롭지 않아서 일찍이 예문관, 홍문관에서 촉망받았는데 아버지보다 먼저 졸(卒)하게되어 모두가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사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직제학 상서원 정에 증직되었다.

배위(配位)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참봉 광지(匡址)의 여(女)이시다.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으며 아들이 없어 중형(仲兄) 청산현감(靑山縣監) 휘(諱) 엄()의 삼남 희장(喜長)으로 대를 잇도록 하였고, 두 딸은 한산인(韓山人) 금부도사 이만경(李萬慶) (홍문관수찬 李行源의 子)과 청송인(靑松人) 정산현감(定山縣監) 심식(沈栻) 청성군 심정화(靑城君 沈廷和)의 자(子)에게 출가하였다.

정부인(貞夫人)은 상수(上壽)를 누리시고 1694년(숙종20)돌아가시니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산37-29번지 선영에 공(公)의 옆에 모시다. 상적저수지로 오르는 길 옆 토끼마당에 절이 있는데, 그곳이 공(公)이 사시던 옛터이다. 보서(譜書)에는 기일 (忌日)이 십일월 구일(十一月 九日)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