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이빈(1623~1697)의 본관(本貫)은 덕수(德水), 자(字)는 형숙(馨叔)이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때의 무신(武臣)이다.

1623년(인조즉위년) 증 좌의정 백천군수(白川郡守) 이경민(李景閔)과 정경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와의 팔남 일녀중 셋째로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 고등동 등자리)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보통아이들과 달리 기국과 도량이 깊고 침착하였으며, 용맹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나 약관 20세(1642년 3월)에 식년(式年) 무과(武科)급제하였다.(인조20)

낭청(郎廳) 사과(司果)로 관직에 나갔고, 임기를 마치자 비변사의 추천으로 1645년(인조23)거제현령(巨濟縣令)에 임명되었다. 이후 선전관(宣傳官), 도총경력(都摠經歷)을 거쳐 덕원부사(德源府使.함경도 의주)를 역임하고, 홍주영장(洪州營將)으로 보임 시 임금으로부터 납약(臘藥)을 하사받았다.

1661년(현종2) 부호군(副護軍)으로 잠시 있다가,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왕의 호위와 대궐의 숙직을 맡아보았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고, 1665년(현종6) 노강진수군첨절제사(老江鎭水軍僉節制使. 평남 청천강 하류), 해미현감(海美縣監 충남 서천), 영흥부사(永興府使 함남 영흥), 소강진수군첨절제사(所江鎭僉節使制 황해도 옹진) 등을 거쳐 다시 오위장(五衛將)으로 궁중숙위를 담당하였다.

1673년(현종14) 철원부사(鐵原府使)에 부임하였으나, 보임 시 춘천부사(春川府使) 김환(金煥)의 이름을 환(奐)字로 잘못 쓰는 실수로 추고 당하였으며, 이듬해 죄를 얻어 삭직 방송되었다가, 숙종즉위와 함께 직첩을 돌려받고 귀성부사(龜城府使 (평북 구성)에 제수되었다.

이때 묘당에서 당상관이상의 쓸 만한 무신을 30인 가려 뽑을 때 선발되었다. 1676년(숙종2) 훈련도정(訓鍊都正)을 거쳐 1679 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었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옮겼다가 충청감사 (忠淸監司) 오시대(吳時大)를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밀소를 올렸다하여 이듬해 삭탈관직 되었다(충청수사 보임 시 오시대가 융복(戎服)을 구입하는 것을 허적(許積. 1610~1680)의 모반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잘못 알았다) 이 일은 9년 후 기사환국 (己巳換局) 때 유배까지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등 당쟁에 휘말리게 된다.

1694년에는 폐비(인현왕후)복위운동에 연루되어(주동자들에게 은전(銀錢)을 대고 대장으로 추대된 혐의가 있었으나 당시 에는 유배 중 이었다.) 남인(南人)들에게 공격당한다. 그러나 숙종의 의도된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맞아 남인들이 축출되고 대장으로 추천되어 서용하라는 명을 받지만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었다.

이빈은 무과 급제 후 53년간 네 임금을 모시며 국방을 책임졌었던 무신으로서, 죽기 전 까지도 주강에 나가 북로 봉화의 소홀한 점을 상세히 아뢰고 변통할 것을 청하는 등 무신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1697년 졸하니,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 군에 봉하여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산 23-8번지 대왕주유소에서 상적저수지 오르는 길 우측 덕수이씨 선영(난사랑 화원에서 1시 방향 100m)에 장사지냈다.(宮基 乾坐)

배는 貞夫人 三嘉李氏로 찰방 雲吉(운길)의 딸이며, 일남이녀를 두었고 합장묘이다.

계배는 貞夫人 陽川崔氏로 이남일녀를 두었으며, 묘는 같은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