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1629~1689)의 본관(本貫)은 덕수(德水), 자(字)는 추윤(秋胤)이다.

1629년(인조7) 백천군수(白川郡守) 증 좌의정 이경민(李景閔)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 병절교위 하(河)의 딸)와의 팔남 일녀 중 오남(五男)으로 출생하였다.(당시 부친은 용인현령에 보임하고 있었음) 시대적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 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당시에는 백부(景顔. 사간원정언역임)와 숙부(景容. 전라도관찰사. 景憲. 병조참판. 景曾. 이조판서)가 요직을 역임하고 형(주(稠) 신천 군수. 엄(䄋)청산현감. 래(䅘)승정원좌승지. 유(秞)병조참판. 빈(穦)경상우도병마절도사. 류(榴)장연부사) 사촌형제(穆창평 현령. 정(程)승정원좌승지. 柙사헌부대사간. 䄷성주목사. 찰방. 穉호조정랑. 稹용인현령. 嵆사간원대사간) 조카(喜相홍산현감 . 喜夏형조정랑. 喜泰수군절도사. 喜陽무겸선전관)등 이 과거에 연이어 급제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던 시대라 열심히 수학하 였으나 급제는 하지 못하였다. 여러 형님들이 저마다 등과하여 서울 혹은 지방에서 근무를 하게 되자 자연히 선산(先山)을 보호하고 관리 할 자손이 필요하였다.

덕수이씨는 본관을 덕수(德水)로 하고 대대로 덕수현 (현 개성부근)에서 터잡아 생활을 영위하다가 조선시대 이르러 공조참 의 춘당공(春塘公) 휘(諱) 양(揚)께서 조선개국과 더불어 파주로 옮겨오신 이후 이곳은 이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그 후 춘당공의 고손인 수사공(水使公) 휘 울(菀)께서 지금의 문산읍 선유리 돈유동에 터를 정하였는데, 이후 수사공의 손자 덕풍군(德豊君) 휘 통(通)께서 재종숙부(再從叔父) 휘 인상(麟祥. 靖國功臣 海豊君의 아들)에게 출계하며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등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덕풍군의 형님인 승지공(承旨公) 휘 적(適)께서 후사(後嗣)없이 일찍 돌아가시게 되자 둘째 아들인 의정공(議政公) 휘 경민(景閔)을 본종봉사(本宗奉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생활의 근거지가 이미 서울과 광주(廣州)로 옮겨졌으며 다시 선산으로 돌아 가야할 형들은 관직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효심이 가장 깊었던 추윤공께서 선산이 있는 파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제사를 모시고 묘를 수호하며 이후 후손들이 이곳에서 번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689년(숙종15)돌아가시니 향년 61세 이시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아버지는 제원찰방(濟源察訪 현 충남금산)을 지낸 홍민(弘敏)인데, 황해도 해주에 거주하며 율곡의 학문을 배우고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生員)에 합격하였고 이이(李珥)와 성혼 (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임금에게 상소하는 등 지역적, 학문적으로도 사돈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묘는 파주군 임진면 선유리 묘좌(卯坐)에 배위(配位)와 합장(合葬)으로 장사 지냈으나 2005년 국가로부터 수사공 묘역과 제전(祭田)이 문산 첨단 산업단지로 편입, 수용되어 현재 문산읍 선유리 문산첨단산업단지내 공원(구 파주 문산읍 선유리 산 14번지 덕수이씨 선영)에 조부(祖父) 증 승정원 좌승지 휘 이적(李適)묘하에 부인 파평윤씨와 합장묘로 이장(移葬)하였다.

자녀는 삼남 일녀를 두었는데 장남 희발(喜發. 1655 효종6~1681.10.26)은 숙종 丁巳年(1677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고, 차남 희봉(喜鳳 1656 효종7~1736 )향년 83세이다.

삼남은 희구(喜龜 1660 현종1~1735)인데 향년 76세이다 딸은 江陵人 최훈(崔塤)과 昌寧人 조하형(曺夏亨)에게 출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