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 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시 · 그림 · 글씨에 능했던 여류 예술가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 · 임사재(妊思齋)라고도하며 본명은 인선(仁善)이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사임당은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얼마 뒤 선조 때부터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이미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그림 · 글씨 · 시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어죽(魚竹) · 매화 · 난초 ·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 · 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다.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여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 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 인 글씨였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여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 ’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 라고 격찬하였다.

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에 머문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었다. 즉 첫째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먼저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 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 생활과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 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 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이(李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 기를 저술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李珥)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매창(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